작 품 명 : | 사랑, 때를 기다리는 마음 |
작품규격 : | 30F(73cm x 91cm) |
재 료 : | 캔버스에 유채 |
창작년도 : | 2014 |
작 가 명 : | 황호춘(대한민국 아카데미 미술대전 우수상 수상) |
[작가노트] http://www.porart.com/admin/category_edit.php?parentcode=1235719783&cb=N [평론] 작가는 새, 꽃, 물고기, 도자기 등의 친숙한 소재를 사용하여 형태를 통해 전달되는 시각적인 이미지 보다는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재발견 하고자 한다. 형태를 소극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윤곽이나 형태가 모호하여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기에 거기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를 암시하고 있다. 회색조의 색채이미지가 지배하는 가운데 갈색 및 황색 검은색 등의 색채들이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내는 미묘한 중간색조의 시각적인 이미지는 작가의 정신적인 깊이를 반영하고 있다. [라메르 갤러리 전시 - Prologue] 도자기, 새, 꽃, 물고기 등의 친숙한 이미지를 주제로 삼고있는 황호춘 작가는 형태를 통해 전달되는 시각적인 이미지 보다는 독창적이고 개별적인 조형적 해석으로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재발견하고자 한다. 회색조의 색채 이미지가 지배하는 가운데 미묘한 중간색조의 색채들의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내는 시각적인 이미지는 고상하고 세련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갤러리 라메르 관장 - 황영옥] [고상하고 세련된 조형미를 탐색] 캔버스는 화가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이다. 단순히 아름다운 시각적인 이미지만이 아니더라도 캔버스에는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있다. 내용은 시각적인 이미지와 더불어 상징 은유 암시 따위의 방식으로 표현된다. 설령 눈에 보이는 사실을 재현하는 사실적인 형태일지라도 화가는 그 자신의 꿈과 사랑 소망 따위의 염원을 담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단지 시각적인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화가는 없다는 뜻이다. 황호춘의 그림은 생각이 많다. 다시 말해 형태를 통해 전달되는 시각적인 이미지보다는 그 안에 숨겨진 의미가 많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단순히 그림 속의 형태에만 의존하려 한다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실제로 작품 대다수는 형식보다도 내용을 중시하는 편이다. 그러나 결코 난해한 그림은 아니다. 오히려 내용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형태를 통한 시각적인 이해는 그리 어려운 편이 아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결코 낯설지 않은 소재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에는 새 꽃 물고기 도자기 과일 악기 인물 산 해 달 말 따위의 소재들이 반복된다. 이들 소재는 그림에서 흔히 다루는 것들로서 누구에게나 친숙하다. 그러고 보면 그의 그림은 시각적인 이해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는 듯이 보인다. 다만 형태가 소극적으로 묘사됨으로써 선명하지 않을 따름이다. 윤곽이 불명확할뿐더러 형태가 모호하여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기에 거기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를 찬찬히 살펴보아야 할 정도이다. 이렇듯이 보여지는 사실보다는 은닉된 내용을 중시하는 경향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형식의 작품은 형태의 재해석이라는 방법을 따른다. 단순히 보여지는 사실을 옮겨다 놓는 재현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개별적인 조형적인 해석에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태는 부분적으로 왜곡되거나 단순화되며 변형되기 일쑤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이미지가 드러나는 일이 거의 없다. 작품에 따라서는 실루엣처럼 표현되는 경우도 있어 간신히 그 형태미를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물론 사실적인 공간감도 기대할 수 없다. 안개에 가려지는 듯한 모호한 형태가 되기 일쑤이다. 이처럼 모호한 이미지 속에는 무언가 담겨 있는 듯이 느껴진다. 숨겨지는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되는 것이다. 그렇다. 애매하고 모호한 표현은 그림 속에 은닉된 의미내용이 있음을 암시하기 십상이다. 실제로 그의 작품 역시 보여지는 사실 이면에 담긴 내용을 중시하는 경향이다. 애매한 형태로 나타나는 소재들은 저마다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보여지는 형태 속에 숨겨지는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그의 그림에서 지시하는 상징성은 그 자신의 종교와 연관되어 있다. 그는 이들 소재를 통해 하나님이라는 절대자를 향한 그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들 소재는 절대자와의 소통을 매개하는 상징적인 언어인 셈이다. 더불어 우리들 세상에게 건네는 메시지인 것이다. 즉, 세상을 향한 그 자신의 개인적인 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개인적인 삶의 체험이 자리한다. 현실적인 삶 속에서 부딪치는 모든 일들이 어떤 거역할 수 없는 힘에 의해 이끌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여 실행하는 일상사들이 따지고 보면 절대자의 주관 아래 진행되고 있다는 믿음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모두가 이러한 믿음을 구체화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해 그는 이들 소재들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형식면에서 보자면 저마다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소재들을 선택하여 화면에 배치하는, 일종의 구성적인 작업인 것이다. 사실적인 공간 및 형태를 벗어나 변형하거나 왜곡시키는 수법으로 현실성을 차단한다. 이는 시각적인 이해를 뛰어넘어 내면세계로 이행하기 위한 수법이기도 하다. 서로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소재들이 하나의 화면 속에 공존한다는 일 자체가 일상적인 시각을 벗어나는 일이다. 한마디로 우리로 하여금 일상적인 감각을 상실케 하여 일시적으로 환상 속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다. 비현실적인 색채이미지가 그러하고, 비현실적인 공간이 그러하며, 부드러운 화면의 표정이 그러하다. 하지만 그 비현실적인 이미지 속에는 달콤한 꿈이 있고 환상이 있다. 아름다우면서도 고상한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는 개별적인 미적 감각에 의해 재해석되는 형태미와 세련된 색채이미지에서 비롯된다. 회색조의 색채이미지가 지배하는 가운데 갈색 및 황색 검은색 따위의 색채들이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내는 미묘한 중간색조의 시각적인 이미지는 정신적인 깊이를 반영한다. 보여지는 사실 너머에 존재하는 그 무엇을 겨냥하는 탐미적인 시각의 결과이다. 그림 속에 생각을 담는 일은 오랜 사유의 축적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시간이 압축 및 농축이 결과적으로 사유의 그림자로 현시된다. 그러나 내용을 떠나서도 그의 그림은 조형적인 세련미와 깊이가 있다. 이제 그 스스로 그림의 맛을 음미하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좀더 절제된 시각을 필요로 하는 시점이다. 내용과 더불어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할 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신 항 섭 (미술평론가) |
출처[포털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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