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30일 토요일

터누름 - 작가 홍승운


작 품 명 : 터누름
작품규격 : (84cm x 29cm 약12호)
재    료 : 삼베에 옻칠
창작년도 : 2013
작 가 명 : 홍승운



[작가노트]

오랫동안 컴퓨터게임 그래픽이라는 일을 해 오면서, 캐릭터의 창조란 역할에 매료되어 인체가 가진 아름다움의 과장과 극대화에 노력했었다. 순수미술을 하는 지금에도 그 영향이 남아있어서 그런지 인체 위주의 작업을 하고 있다.

그림 그리는 작업은 평범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또 표현하는 일인 것 같다. 선이 갖는 아름다움과 인체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 그리고 이 아름다움은 최종적으로 춤추는 사람들의 한복 입은 자태에서 정점을 이룬다. 그래서 나는 춤추는 사람을 그리고 있다. 무희들의 몸과 음악이 하나 되는 무아의 세계 속으로 거닐다 보면 그 속에서 나도 하나가 된 거 같은 착각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로 기교나 세련됨이 아니다. 현란한 춤 솜씨가 아닌 일상에서 평범하게 볼 수 있는 우리의 생활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랬듯이 오랜 세월 동안 우리들의 몸에 배어있는 몸짓이다.
원초적으로 인간들이 갖고 있는 기쁨, 슬픔, 한, 기원, 소망, 욕심 등이 미래로 갈수록 그 크기가 더욱 커져만 가는 현실 속에서 내면을 갈무리할 수 있는 몸짓이 필요하다. 즉 우리네 삶의 정화작용이다.

나의 그림 재료는 모두 천연이다. 삼베에다 옻(진액)으로 그림을 그린다. 삼베는 내구성과 견고성이 뛰어나고, 습도조절과 항균성을 자지고 있으며 옻칠은 만년 이상의 보존력을 가지고 있는 최고의 천연 도료이다. 삼베가 지니고 있는 거친 질감은 독특한 느낌을 주고, 옻은 특유의 은은한 자연 색감이 보여준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옅어졌다 진해졌다 하는 색감도 매력적이다. 또한 옻에서는 인체에 이로운 성분이 나오기 때문에 건강에도 도움을 준다.
옻의 성분은 특이해서 물과도 섞이고 기름과도 잘 섞인다. 옻으로 작업을 하면 할수록 점점 옻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작업은 불편하고 번거로운 것이 사실이지만 오래가는 그림을 위해서라면 앞으로도 계속 옻 작업을 할 것이다.

[평론]

홍승운 화백의 춤을 말하다

그림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작가의 의도를 찾아 그림을 이해하려 노력했으나 이제는 그림 앞에 서서 그저 바라볼 뿐입니다.
그림을 보고 느끼는 것. 그것이 전부입니다. 선(線)을 통해 선(仙)으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겠지요.
홍승우 화백의 그림을 보면 삶의 깊이가 느껴집니다. 그것은 아마도 천(天)·지(地)·인(人)의 조화가 그림 속에서 춤과 옷, 그리고 선으로 보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는 삼베의 질감을 활용하여 거친 땅으로,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는 자연이 준 최고의 도료인 옻을 사용하여 유구한 역사의 깊이를 표현하였지요. 또한 세월이 지나면서 발현되는 색의 신비함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인류의 귀한 선물임을 작가는 알았을 것입니다.

작가는 한복을 입고 춤을 추는 여인의 옷자락에서 부드러운 선을 보았고, 세상의 아름다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선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 아름다움의 극치를 깨닫는 순간부터 화폭엔 작가만의 춤이 펼쳐지기 시작했지요.
때론 슬픔과 노여움, 기쁨과 즐거움을 아울러야 할 시점에서, 혹은 숙명적으로 지닌 실존적 고도 그 초월적 고립감을 투영하고자 하는 객관적 상관물들 인생에서 춤을 추듯이 나스럽게 살고자 하는 그의 고뇌와 열망을 춤으로 승화시키고 싶었을 것입니다.
먼저 작품에 등장하는 나비와 한복을 입은 여인의 지극히 몰입된 표정을 봅니다. 허공을 걷듯 가벼운 몸짓과 부드러운 선에서 느껴지는 곡선을 향한 긍정의 힘, 그 손끝에 날아든 나비의 평화로움, 기울어진 얼고에 앉은 또 다른 하나의 나비와 만남은 인간과 자연의 자연스러운 조화를 한 폭의 그림으로 보여주지요.
작가는 자칫 가벼울 수 있는 춤을 자연스럽게 검붉은 옻의 색감으로 무게를 두었을 것입니다. 또한 작품에서 자연스럽게 너울거리는 한복의 선은 모나지 않고 부드럽게 살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표현했겠지요. 긴 시간 동안 어떤 일에 대하여 크게 거부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일관하는 그의 삶의 방식이 투영되었을 것입니다.
작가의 그림은 내면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작가의 정신은 살아갈 방향을 결정짓지요. 해마다 초겨울 들어 열리는 동학 위령제에서 진행하면서도 말없이 몸으로 돕고 있는 모습을 보면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자신의 색을 천년의 사랑으로 올곧게 지키는 옻을 닮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작가는 옻의 매력에 빠지고 옻과 소통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젊은 날 그도 때로 힘든 날이 있을 터. 육신의 한계와 삶의 고뇌를 벗어버리고 살고자 하는 욕망을 물아의 경지에서 춤을 추듯 그림을 그리며 영혼의 고향에 다다르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아리아리, 아리랑 아라리오. 춤을 춥니다. 삶에 안기어 추는 춤입니다. 살아있음이 피어나는 울림과 느낌을 들여다봅니다. 고향 친구를 만난 듯 자연스럽고 편안합니다. 나비가 날며 꽃을 닮은 여인의 향기를 느껴봅니다. 백자 달 항아리를 보듯 절로 빠져드는 무아의 경지에 들어봅니다.

작가는 그리기 위해 사랑하고,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또한 그림을 그리지요.
그것이 곧 세상의 온갖 망상과 욕망을 떨쳐버리고 자기완성을 향한 길임을 알기에, 그저 춤을 추며 천년의 사랑을 염원하는 여인의 모습, 영원을 향한 바램, 흥의 정·중·동 춤사위, 그것이 곧 작가의 그림입니다.

-시인 황예순-


출처[포털아트]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