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29일 화요일

기억너머-그리움-목련이 피었습니다. - 작가 김순겸


작 품 명 : 기억너머-그리움-목련이 피었습니다.
작품규격 : 8F(46cm x 38cm)
재    료 : 캔버스에 아크릴
창작년도 : 2008
작 가 명 : 김순겸



[평론]

예술은 창조다. 창조는 독창적이어야 한다.

김순겸화백은 외국인의 정서에는 없는 우리 문화(한지 방문)를 그가 처음으로 화폭에 담아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한국인만이 느낄수 있는 한지 문화와 정서를 화폭에 담아 작품으로 성화시키고 있다.

세계화되어 있다. 외국 작품을 모방한 작품은 인정받을 수 없다. 미술에도 한류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을 위하여 노력하는 그가 아름답다.




그리움의 창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단순한 말은 화가들의 창작과 관객들의 작품 해석 행위에 적지 않게 도움을 주어왔다. 눈이 마음의 창이면 그림은 무엇인가? 그림은 눈이라는 마음의 창을 통해 본 세계를 화폭에 담아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눈과 창과 그림은 한데 묶어 사유의 대상으로 다루어질 가능성이 생겨나게 된다.

눈이 창이고 창이 그림이라는 등식도 가능하다. 부언해 설명하자면 눈과 창과 그림은 '시적 허용(詩的 許容)'의 범주에서 동일한 기능을 지닌다는 것이다. 창문을 중심 소재로 삼고 있는 김순겸의 그림을 미학적 측면에서 접근하기 위해 우리는 여기서 마음의 창으로서 눈에 대한 연구의 사례를 좀더 살펴볼 필요성을 느낀다.

미술사가 마크 르보는 눈에 대한 해석을 다음과 같이 내린 바 있다. '눈이 밖으로 향할 때 외적 세계로서 풍경이 펼쳐지며, 눈이 안으로 향할 때 그것은 내면의 영혼을 비추어 준다.' 이 아름다운 시적 표현은 우리에게 눈이란 양면적 속성을 가진 대상임을 전해준다.

즉 세상과 내면의 접점으로서 안과 밖을 연결하는 이중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의 눈이 맑은 영혼을 비추어 준다고 했을 때, 그것을 대하는 것은 눈을 가진 어떤 이 자신이 아닌 관자(觀者)가 된다. 이 때, 눈은 거울과 같은 기능을 담당하며,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심리적 세계가 뒤섞여 감염된다. 이제 눈은 관객의 시지각에 의해 인식 대상으로 확대되어 그 의미가 증식되고 이러한 공식은 곧바로 그림의 해석에 적용될 수 있다.

김순겸의 이번 개인전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대부분 창문을 통해 펼쳐지는 풍경이다. 문은 반쯤 열려 있으며, 그것을 경계로 산이나 오솔길 혹은 풍경(風磬)이나 봄을 알리는 전령으로 화충(華蟲)들이 그려져 있다. 창문의 안쪽에는 도자기나 목각기러기, 혹은 화살촉이나 등잔 같은 사물들이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화면의 구성 방식은 앞서 언급한 눈의 세계를 창이라는 대상으로 전환시켜 표현하려는 의도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창문을 경계로 외부와 내부의 풍경을 동시에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의 그림은 작가 자신이 눈을 통해 바라본 외부 세계와 내적 세계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안과 밖의 세계가 한 화면으로 동시에 표상되는 김순겸의 그림은 결국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작가는 이러한 이중적 구조를 <그리움>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고 있다. 현실에 근거한 과거의 기억이 그리움의 실체라면, 그의 작업은 고향을 떠나 척박한 외지에 몸붙여 사는 작가의 심상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이 보는 이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리움이란 인간이 지닌 서정적이자 보편적 심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이름모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노스텔지어로서, 또는 보이지 않는 가치에 대한 염원으로서 생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대상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는 그리움이 없는 세계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야생의 짐승들처럼 떠돌며 생존을 위한 욕망과 투쟁의식으로 무장된 채 숨가쁜 하루를 보내는 익명의 자아(自我)들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러한 현실에서 김순겸의 창문 연작은 여유의 소중함과 내면으로 연결된 존재의 상황에 대한 지속적인 확인 작업이라는 점에서 고유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2003. 9.김 영 호 (미술 평론가)




출처[포털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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